학교는 11월말로 학기를 마치고 12월, 이제 긴 겨울방학입니다. 갈무리를 마친 들판은 고즈넉합니다. 돌아보면, 올해도 학교의 갓골 논에서 벼농사를 잘 마쳤습니다. 올해 처음 겪은 일은 그동안 추수 때 느끼지 못했던 날씨였습니다. 한여름 땡볕에서 추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논둑을 걸어다니기에도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급변하는 기후 변화는 농부들이 직접적으로 느낍니다. 한해 식량을 마련해 놓으니, 이제 마음이 더욱 여유로워 집니다. ‘밥은 굶지 않겠구나’ 안심이 되어서인가 봅니다.

학교의 갓골 논에서는 여러 가지 활동을 합니다. 논학교에서는 지역 15곳 이상의 어린이집 아이들이 논에서 놀며 활동하고 논 생물들을 살펴보기도 하고 때가 되면 논에 들어가 고사리 손으로 모를 심고 추수를 합니다. 그리고 홍동초등학교 전교생도 갓골 논에서 모내기와 추수를 합니다. 수확한 벼중 무투입은 대구한살림으로 전량 보내고, 나머지는 쌀정기회원들에게 매달 발송하며 또 학교에서 자급합니다. 우리가 한 해 농사지은 쌀을 나누고 또 한 해 동안 먹을 수 있으니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논은 우리에게 이렇게 한 해 식량을 마련해주고 그 외에 여러 가지 생태적인 환경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책 [망쪼든 세상 그래도 기리버서 –농부 할배 천규석의 편지/저자 천규석/출판사 신생] 에서 ‘논습지를 살려야 늪습지도 산다’ 중 일부를 싣습니다.

논습지가 늪습지보다 더 생태적이다

논은 늪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생산성이 높은 제2의 생태계다. 생산성만 높고 지속이 불가능한 공업적 생산성은 생태적이 아닌 파괴적 또는 마이너스적 생산성이다. 그런데 논은 그 높은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속이 가능했기 때문에 제2의 생태계가 되는 것이다.

주먹구구식으로 아주 단순화시켜 논의 생태성을 계산해보자. 비료농약에 의존하는 요즘의 관행농으로 하면 논 200평 1마지기 당 쌀이 80kg 들이로 세가마 가까이 나온다. 여기다 이모작이 가능한 논에서는 요즘 주로 마늘, 양파 등의 환금작물을 심지만, 보리나 밀을 심을 경우 80kg 들이 두 가마 이상의 곡물 생산을 낸다. 장기적 지속이 불가능한 요즘의 비료, 농약 대신 전통적 유기농으로 해도 쌀은 두 가마 정도, 이모작인 보리나 밀은 한 가마 이상으로 생산된다. 게다가 수심이 늪만큼 깊지 못해 단위 면적당 서식량은 다소 적지만, 잉어, 붕어, 미꾸라지 등의 늪과 거의 비슷한 종류의 수생 민물고기들을 품고 있었다.

이처럼 논은 늪이 생산할 수 없는 주곡을 대량 생산하면서도 늪과 비교할 수 없는 광활한 면적으로 늪의 생태적 역할도 동시에 하고 있는 거대한 습지다. 늪만 습지가 아니다. 반생태적 거대 인공댐과 달리 논은 수심이 얕고 규격이 적게 분할되어 오히려 생태적인 작은 인공습지들의 집합이다.

논댐의 가장 큰 생태성은 토양유실의 방지다. 경사진 산지와 밭은 비가 올 때마다 겉흙이 조금씩 씻겨 내리거나 때로 크고 작은 사태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런 비탈밭이나 산자락도 계단식으로 논을 만들면 토양유실을 거의 완벽하게 방지한다. 논의 지면은 경사가 아니고 수평이기 때문에 그리고 논두렁으로 물을 막아놓고 있기 때문에 비가 와도 논바닥 흙이 씻겨 내리지 않는다. 논바닥에 떨어진 빗물이 물꼬까지 찬 뒤의 빗물만 물꼬를 통해 넘쳐서 인접한 도랑이나 논 옆에 개설한 수로를 통해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미 관광지가 된 남해의 계산식 논이나 남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산간의 가파른 계단식 논들이 그 살아있는 증거다. 물론 논도 가끔은 폭우가 쏟아질 때 빗물이 물꼬로 다 빠지지 못해 논두렁을 넘쳐서 논둑을 허무는 사태로 토양유실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상시적이 아니고 예외적이다.

논습지의 또다른 생태성은 지하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역할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논에 물이 담겨 있는 동안은 그 물이 서서히 지하로 스며들어 일정한 지하수위를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 또 하나 작지만 무시못할 논물의 역할은 삼복염천의 한낮 더위를 그 많은 논들의 수증기 증발로 조금이라도 낮춰주는 온난화 방지 역할이다.

위에서 말한 생태적 역할만으로도 돈으로 환산하면 곡류생산성에 뒤지지 않는다며 한때 농업학자들이 그 수치를 경쟁적으로 제시하며 이를 입증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생태적 가치는 돈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생명가치다.

늪습지는 가질 수 없고 논습지만 가진 독보적이고 탁월한 생태적 가치는 벼 재배 때의 논물 자체가 천연비료를 생산하는 생명의 산실이라는 것이다. 수심이 깊은 늪지와 달리 논물을 수심이 매우 얕다. 그래서 봄부터 가을까지 태양열을 받고 있는 논물 온도는 공기나 지표 온도보다야 낮지만 상당한 고온일 수밖에 없다. 높은 온도의 이 논물은 공기 중의 질소를 걸러먹고 사는 여러 미생물들의 천국이 됨으로써 그 미생물이 먹고 남는 논물 속의 질소화합물과 수명을 다한 미생물들이 동시에 작물에게 천연거름으로 제공된다. 전통시대에 이모작이 불가능한 일모작의 저습답에서는 짚을 다 거둬가고 인공적 퇴비를 하나도 투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고도 해마다 두 가마 가까운 일정한 쌀 생산을 지속적으로 내준 것은 기적이 아니라 스스로 비료를 만드는 논물의 생태과학성 때문이다. 인류생명의 젖줄이자 보고인 논을 살리고 지켜야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생태적 감수성도 이 같은 농경의 생태 과학적 감수성으로부터 하나하나 되살려가야 한다.

2024년 12월 19일 풀무학교 전공부 식구들 올림